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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라는 성씨
2018-05-24
조상으로 삼는 시조는 누와와 윤추옌이다. 명나라 시대에 평양부, 특히 홍퉁현과 자오청현 출신이었던 윤씨 일족의 선조들은 명 초기에 내려진 황제의 칙명에 따라 홍퉁의 큰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 후손들은 허난성, 산둥성, 허베이성, 베이징, 톈진, 산시성, 간쑤성, 안후이성, 장쑤성, 후베이성, 후난성, 내몽골, 헤이룽장성, 산시성 등지로 널리 퍼졌다. 윤씨 성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한 시대의 문헌인 「풍속통·성씨편」에 나타난다.
[성씨의 유래] 이 성씨에는 크게 세 가지 유래가 있다. ① 여와의 후손에서 비롯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상고 시대에 복희의 동생인 여와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지혜가 남달랐고 용모 또한 빼어났다. 복희의 치세 때 그녀는 오로지 형을 돕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사회는 아직 무분별한 집단혼의 시대로, 사람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어머니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가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고, 여와는 혼인 계약과 예식 등을 포함한 혼인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가 정착된 뒤에야 인류는 원시적 모계제에서 벗어나 가족 단위로 조직된 공동체 생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는 인류 문명사에 있어 중대한 진일보였기에, 역사학자들은 여와를 ‘신성한 중매인’으로 부른다. 복희가 세상을 떠난 뒤, 백성들은 그녀를 지도자로 추대하여 ‘황후’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녀의 성이 윤이었으므로, 그녀의 후손들은 윤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 ② 윤의 성에서 유래하였다. ‘육지’에 따르면, 전욱의 증손인 노중이 한때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째 아들 추연이 윤의 나라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대의 윤국은 ‘윤’이라고도 표기되며, ‘좌전’에는 현재의 후베이성 윈현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를 후베이성 안루현에 두기도 한다. 이후 윤국은 초나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 뒤로 윤의, 윤, 윤, 윤, 그리고 원 등의 성씨가 발생하였다. ③ 고대 소수민족의 성씨에서 비롯되었다. ‘위서’의 ‘관직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 북위 왕조에는 선비족의 복합 성씨인 디윈이 있었는데,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이것이 윤으로 개칭되었다.
[성씨의 유래] 윤씨의 주요 본관은 낭야군이다. 낭야군은 원래 춘추시대 제나라의 한 현이었으며, 춘추말기에 월나라의 구천 왕이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후, 진시황제는 낭야군을 설치했는데, 이는 오늘날 산둥성 동남부의 교남현, 주청현, 린이현 일대에 해당한다.
[문벌당] 윤씨 가문의 주요 문벌당은 평릉당이다. 평릉당: 한나라 시대에 평릉 출신의 윤창은 오장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장은 왕망의 한나라 황위 찬탈을 반대하다가 처형되었다. 이때 윤창은 왕망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저는 오장의 제자이오니, 스승님의 유해를 수습하는 일을 제가 맡겠습니다!” 그의 의로운 결의는 세간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왕망조차 민심을 무시하고 그를 처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후한 광무제가 한나라를 회복한 뒤, 윤창은 중위와 어사중승으로 벼슬하였다.
[가문 현판 대련] 윤씨 가문의 대표적인 대련은 다음과 같다: “교육을 장려하여 청자현의 치리를 옹호하였다”(윤경룡); “기구를 제작하며 소부청의 공예에 뛰어났다”(윤정행). “선인의 동굴에서 술을 구하던 중 배항이 미인을 만났다”(윤영); “중령에서 이별을 회상하며 나로인이 시를 지었다”(윤영). “스승을 공경하고 도를 귀히 여기며, 무지한 자를 훈계하고 배신을 경계하였다”(윤창); “순결과 절개의 표상으로, 황명을 거역하여 군사를 지켜냈다”(윤씨 일가); “군사와 정치에 엄격한 규율을 세워 수나라를 회복하고 패권을 확립하려 하였다”(윤정행).
[주목할 만한 인물들] ‘중국 성명대사전’에는 윤씨 성을 가진 인물이 아홉 명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성명대사전’에는 열세 명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이름이 ‘윤’으로 전해지는 저명한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한나라 시대에는 평릉 출신으로 중위와 참모를 지낸 윤창이 있었고, 수나라 때에는 좌군장군 윤정흥이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문종 재위 시절에 궁중악부 부제를 지내며 여가수 ‘윤영’으로도 알려진 윤초부가 있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서주 출신의 세 대에 걸친 학자인 윤경룡과 그의 손자 윤봉지가 있었으며, 원나라 시대에는 도찰관 윤총룡이 있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문창 출신의 학자 윤명산과 산허현의 부현령을 지낸 윤복성이 있었다.
[인구] 제4차 전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산시성에는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2,338명이며, 그중 린펀시에 205명, 홍퉁현에 24명이 거주하고 있다.
[제단장] 대회화나무 아래에 자리한 사당의 제3호 제단장에는 윤씨 문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키워드:
홍통 큰 회화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