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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주님의 기원 탐구
2018-03-23
‘신주’는 우리가 흔히 영정으로 부르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찬란한 문화 속에서 제사 의식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대에는 광활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힘에 맞닥뜨린 인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고 느꼈다. 이에 따라 인간은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모든 자연 현상을 ‘신성’에 귀속시키는 한편, 신들의 보호와 축복을 얻기 위해 경건한 언행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제사 의식은 고대 사회의 정치·경제·생산 활동에서 점차 지극히 중요한 사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노예제 사회가 시작된 지 거의 그 초기부터, 제사 의식은 이미 독자적인 문화적 체계로 발전하였다. 사원과 조상묘는 급격히 늘어났고, 제사 도구와 의례 절차는 관습에 의해 확고히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제사 의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도구로 여겨지는 신위판이 탄생하게 되었다. 『논어』의 ‘팔행’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애공이 재오에게 토지신의 제단에 대해 물었다. 재오는 대답하기를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상나라에서는 향나무를,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노나라의 애공이 재오에게 토지신을 표상하는 신위판을 제작할 때 어떤 나무를 사용해야 하는지 묻자, 재오는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상나라에서는 향나무를,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쓴다고 답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토지신의 제단’이 곧 신위판의 초기 원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신들만이 제물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사망한 후에도 노예를 소유하던 귀족들은 역시 신과 같은 의식을 누렸다. 물론 각각의 고귀한 망자에 대해서도 반드시 위패를 마련해야 했는데, 이러한 위패를 ‘신주’라 불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에 신주는 사망한 군주와 제후들을 위해 세우던 영혼의 위패였다. 당시에는 그 위패를 나무나 돌로 만들었으며, 후에는 밤나무가 선호되었는데, 그 이름은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논어』 제8편 제1절에 기록됨). 따라서 신주는 ‘리주’라고도 불렸다. 또한, 망자의 지위에 따라 신주의 규격도 자연히 달랐는데, 예컨대 “천자의 위패는 길이가 열두 인치이고, 제후들의 위패는 길이가 한 피트이다”라는 규정이 있었다(동진 시대의 경학자인 범녕의 『공량전집주』에 주석되어 있음).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비와 평민들은 제사 의식을 행하거나 참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이러한 예법을 감히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어떠한 면죄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 나무 판을 ‘신주’라 부르는 것일까?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이란 제사 의식을 받는 모든 존재를 가리키며, 신들인지 인간들인지에 관계없이 옛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이들을 일컫는다. 한편 ‘주’는 동진 시대의 학자 범녕이 『춘추공양전』에 달린 주석에서 밝히기를, “주란 본질적으로 신이 의지하는 바”를 뜻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주’는 신의 대표이자 그 신의 화신이며, 신이 스스로 머무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신주’라 부르게 되었고, 간략히 ‘주’라고도 불렀다. 노나라 문공 2년의 기록에는 “정축일에 희공의 신주를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노나라 문공 2년 정축월(음력 12월)에 희공을 상징하는 목판을 그의 사당을 위해 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왜 제사에 영정을 반드시 봉안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옛사람들은 제사 의식을 지극한 경외와 큰 중대성으로 여겼다. 공자가 말했듯이 “제사를 드릴 때에는 마치 조상께서 현존하시는 것과 같고, 신에게 예배드릴 때에는 마치 신들이 현존하시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영정은 고인이 진정으로 ‘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형의 표지 역할을 한다. 둘째, 고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오늘날에는 누구나 사진을 통해 추모할 수 있으므로, 제단 앞에서 그 존재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반면 고대에는 그러한 편의가 없었으므로, 초상화를 그리는 일조차도 지극히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고인의 영속적인 현존을 상징하는 영정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존’의 성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먼 길을 떠날 때에도 영정을 함께 지니고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써 때마다 조상을 정성껏 기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봉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오랫동안 사회 계층의 최하위에 머물러 있던 농민들도 지배층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들 역시 제사 의식을 집행하고 참여할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위패는 각 가정에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신성한 물건’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 지배자들은 스스로 엄격한 신분 제도를 유지하면서, 평민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수준에서 제사 의례를 행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위패에 새겨진 글귀에는 이러한 엄격한 신분적 위계가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조상의 위패에는 대개 다음과 같이 새겨졌다. 만약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위패를 제작한다면, “선황부군 ×(성씨) 선생, 자는 ××(이름)”라고 적게 된다. 여기서 ‘황부’란 웅장함과 탁월함을 나타내며, ‘부’는 고인 부모를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서 성공과 훌륭함을 함축한다. 따라서 ‘황부’란 곧 최고의 찬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봉건 지배층은 이를 부적절하다고 간주했다. 평민에 불과한 일개 백성이 어찌 감히 자신의 아버지를 ‘황부’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원나라 성종 시대의 테무르 칸이 다데 연간에 내린 칙령에 따라, 문신들은 물론 평민들까지도 ‘황부’라는 칭호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명부’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청나라의 학자 서천학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옛날에는 조부·부·모의 이름 앞에 ‘황’이라는 글자를 붙였으나, 원나라 다데 연간부터 ‘황’을 ‘명’으로 대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 이유는 문신과 평민 모두 ‘황’이라는 칭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의 의미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있으며, 결코 군주를 가리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일단 칙령이 내려지면,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는 황실을 제외한 모든 가문에서 조상의 위패를 ‘명부군 ×(성씨) 선생, 자는 ××(이름)’으로 새겼으며, 이로써 ‘황’이라는 글자는 오로지 왕실에만 전용되게 되었다.
명나라는 봉건 시대의 예법과 예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로, 군주들은 제사 의례에 전례 없는 중시를 기울였다. 홍무제 주원장은 아예 친히 의식용 문헌을 지어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 동시에 제사 관행을 규율하는 명나라 법전은 갈수록 엄격해졌는데, 황실 가문은 대대로 조상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문신들은 네 대에 걸쳐, 평민들은 세 대에 걸쳐 이를 시행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봉건 사회의 긴 역사 속에서 예법과 제사는 지배층의 철저한 감시 아래 놓여 있었으며, 통치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지닌 모든 문화는 광범한 민중 속에서 발전의 토양을 찾게 마련이므로, 명·청 시대에는 위패를 중심으로 한 민간 제사 풍습이 더욱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통신’과 ‘전주’ 의례—공화제 시대까지도 면면히 이어진 이러한 관행—는 바로 이러한 민간 전통의 정수라 할 만하다.
‘통신’과 ‘전주’ 의식은 대개 고인의 장례 절차 중에 거행된다. 적어도 산서성 남부 진 지역에서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먼저 위패를 마련하고 빈소를 설치한 뒤 엄숙한 제사를 올린다. 매장이 끝난 후에는 위패를 가문의 조상당에 모시고, 이후로는 영원히 숭배받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고 재력이 풍부한 집안들은 종종 저명한 관리들과 명망 있는 인사들을 초청하여 장례 의식에 참석하게 한다. 위패를 준비할 때 주인은 글씨를 미리 새겨 두고, ‘신’ 자의 세로획이나 ‘주’ 자의 점만 남겨둔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귀빈을 초청하여 주홍색 붓으로 그 빠진 획을 ‘신’ 자에 더해 ‘통신’을 이루게 하고, ‘주’ 자에 점을 찍어 ‘전주’를 완성한다. 이는 곧 고인의 영혼이 신령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며, 또한 망자의 혼령이 마땅히 머물 자리에 안착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이 두 가지 의식 가운데 하나만 거행되며, 양쪽을 모두 치른다면 두 명의 귀빈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초청되는 손님들은 학식과 지위, 명성이 남다르기 때문에 초청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그 결과 일반 서민들은 대개 이런 의식을 치를 여유가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통신’과 ‘전주’ 의식을 치른 집안들은 크게 존경받으며, 수십 년이 지나도 마을 골목과 이웃들 사이에서 여전히 감탄 어린 말로 회자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제사 문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특히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예식 행위에서 오랜 기간 신성함의 상징으로 자리해 온 ‘신주’는 거의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신주’가 함축하는 문화적 통찰을 간략히 탐구하고, 성찰이 깊은 학자들과 지혜로운 사유자들께서 이에 대해 정정과 추가적인 성찰을 아낌없이 제시해 주시기를 촉구한다.
키워드:
홍통 큰 회화나무
